프롤로그
여기는 뉴욕에서 서울행으로 들어가는 비행기안이다.
앞으로 장장 15시간 가량을 타고 가야 한다.
지나간 6년에 가까운 유학시절이 주마등 스치듯이 지나간다.
이 기간동안 난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다.
“확실히 버려야 확실히 얻는다”
앞으로는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두렵기도 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처음 일본으로 떠날 때 그 느낌처럼..
Seoul
대기업 S 사에 입사 후 일한지 1년 째 되는 날.
인생의 가장 중대한 전환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해야 하는 일' 에서부터 '하고 싶은 일' 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것.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은
외국 유학가서 음악을 공부하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오는 것.
그것도 가능한 당장.
그러나 대기업 1년 남짓 직장생활 후 가진
총 재산은 350만원.
“이 무슨 황당스럽고 무모한 바램인가?”
라고 생각하면서도
하고 싶다는 무모한 열정은 냉철한 이성과 계산된 논리를 누르고
결국 행동으로 옮깁니다.
Tokyo
미국이 아닌 일본으로 유학지를 선택한 이유는 단 하나. 돈.
지구상에서 아르바이트로 해서 학비를 벌 수 있는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는
“일본” 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무조건 1년안에 학비를 마련한 후 그 이듬해에는 진학을 한다는 자기세뇌를 하면서 일본어학원에서 오전엔 일본어공부, 그 외 나머지 시간은 하루 3개의 아르바이트로 온종일 강행군.
라는 질문들이 하루에도 수차례 섬뜩하게 다가오며
하루하루가 내일을 알 수 없는 불안한 긴장감과 새로운 세계를 향한 기대감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컬트영화같은 나날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흡족한 음악학교를 찾지 못했고 그나마 갈만한 학교의 학비가
미국음대와 별 차이가 없을만큼 비싸다는 것을 알고 멘탈붕괴… 그러다 든 생각.
“그럴바엔 차라리 미국이 낫지 않을까?”
일본 도착 3개월만에 다시 미국학교로 진로를 바꿔
일본에서 학비를 마련해서 미국행을 하겠다는 도전을 감행하게 됩니다.
한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나날.
결국엔 일본에서 10년 같았던 뜨거운 1년을 보내고
드디어 미국행 티켓을 따내게 됩니다.
Boston
그처럼 갈망했던 학교에 입학하니 영국, 쿠바, 러시아, 일본,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로부터 음악을 공부하러 온 많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오로지 음악에만 빠져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연주하며 꿈결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학교에 있던 연습실에 틀어박혀서 평균 연습 12시간으로
수업과 식사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피아노 앞에서 보내거나
교내에 있는 CD 라이브러리에 쳐박혀서 재즈음악을 원없이 듣기도 하고
도서관의 풍부한 자료를 통해 마일스 데이비스, 듀크 엘링턴, 루이 암스트롱 등
숱한 재즈계 거장들의 생애, 창작 세계 등에 대해서도 탐닉합니다.
무엇보다 본격적으로 익히기 시작한 재즈의 즉흥연주와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의 잼세션은 재즈의 무한 매력 속으로 저를 푹 빠지게 만들기 충분했습니다.
그러다 1년 쯤 지났을 때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는 재정상의 문제로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다시 일을 찾게 됩니다. 3~4개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했으나 흡족한 벌이가 되지 않아 벼랑 끝에 몰릴 무렵
저는 같은 학교에 다니던 일본친구의 소개로
“잇쵸 (ITTYO)” 라는 일본식당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잇쵸는 하버드대학 전 정거장에 있던 재패니즈타운가의 일본계 레스토랑입니다.
그 곳은
“미국 안에 있는 하나의 작은 일본”
이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쿄에 살았었지만, 이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도쿄는 물론이고 오사카, 교토, 히로시마, 후쿠오카, 오키나와 등 그야말로 일본 전 지방에서 온 일본인 유학생과 일본인 재미교포들로 하나의 작은 일본사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학비를 마련해야 했던 저로서는 때로는 휴학계를 내고 풀타임(Full time) 으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오전에는 학교인 미국 사회에 있다가 오후 늦게 일하러 갈 때엔 일본사회로
들어가는 마치 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흥미로웠던 것은 잇쵸에서 일하는 사람의 40% 가량이 저와 같은 음대학생이던 탓에 늘 식당에는 재즈음악이 흘렀습니다. 주방에는 낡은 카셋테이프 레코더가 있었는데 당일 일하는 음대학생이 서로 번갈아가며 자신이 좋아하는 재즈뮤지션의 음악을 틀어놓고 일했던 것이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저희 식당은 '재즈음악이 흘러나오는 일본 레스토랑' 으로 소문이 났습니다.
주방은 항시 칼을 다루고 냄비 안에서 우동 육수가 펄펄 끓고 있거나 프라이팬에서 기름이 튀는 다소 위험한 환경이었습니다. 따라서 자칫 방심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일을 할 때는 늘 시각, 청각, 후각 등 오감을 최대한 열고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항상 요리를 만들 때나 음식을 먹을 때 재즈음악을 틀어놓고 하다보니
어느 날 문득 오감으로 재즈가 다가왔습니다.
달콤하고 톡 쏘는 카레향을 맡으며 듣는 라틴재즈의 맛, 달달한 우나동 (일본식 장어덮밥)을 먹으며 듣는 하드밥의 맛, 시원하고 담백한 소바를 먹으며 듣는 쿨재즈의 맛 등 다양한 음식과 음악의 맛이 미각과 후각 그리고 청각 등 오감으로 연결되면서 재즈를 단지 귀만이 아닌 오감으로 또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이 훗날 '온몸으로 느끼는 오감재즈' 책을 집필하는데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잇쵸에서 일본요리를 배움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일본식 워크시스템, 즉, 낭비제거, 정리정돈, 모듈화, 매뉴얼화 등
일본인 특유의 디테일하면서도 시스템적인 사고방식와 업무스타일,
극도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장 등 지금까지 몰랐던 아주 보석같은 체험을 하게 됩니다.
특히, 20년 경력의 베테랑 셰프가 설계했다는 그 내부 공간은 인체공학적으로
인간과 일에 대한 지혜와 통찰력 덩어리였습니다.
일하는 동안 항상 저는
등 관점에서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이 것은 점차 제 삶에, 심지어 음악에까지 적용을 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하루에도 2가지의 극단적으로 다른 이질적인 공간, 즉, 미국음악학교와 일본식당을 오가는 생활은
마치 냉탕과 열탕을 왔다갔다 하는 것처럼
에 대한 자극으로 저의 좌뇌와 우뇌를 번갈아서 사정없이 두드렸습니다.
처음에는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도 있었지만
1년이 지나가자 점차
"음악을 생산성과 효율성의 관점에서 보고
음식을 미학과 감성의 감점에서 보는"
사고의 유연성을 점차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일기쓰듯 기록해나간 수첩은
아주 소중한 저의 자기계발 노트가 되었고
이 독특한 환경이 주는 자극을 통해 학교를 졸업할 무렵,
'무엇을 보느냐보다 어떤 관점에서 보는지가 훨씬 중요하다'
라는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은
녹록치 않았던 유학생활이 준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New York
학교를 졸업한 후 저는 바로 뉴욕으로 날아갑니다.
뉴욕이 워낙 유명하고 매력적인 도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뉴욕에 대해 늘 다음과 같은 의문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 이것을 직접 체험을 통해서 제 스스로 그 이유를 찾고 싶었습니다.
또 당시 친하게 지내던 많은 일본친구들이 학교 졸업후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그저 가난한 재즈뮤지션이더라도 뉴욕에서 살아가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먼저 뉴욕가서 이미 살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죠.
낮에는 맨하튼에 있는 일본계 명품백화점에서 영업일을 하고
밤이면 뉴욕 곳곳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뉴욕의 관광지는 물론이고 미술관, 공원, 콘서트장, 스튜디오, 클럽, 바(Bar),
그리고 기회되는 데로 그들의 파티도 참석했습니다.
그 결과
1년 가까이 뉴욕에 살면서 제가 내린 결론은
한마디로 “예술의 힘” 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뉴욕에서는 삶과 예술, 비즈니스와 예술이 아주 절묘하게 리믹스되어 있다고 할까요?
뉴욕 어디를 가나 다양한 소재에 ‘예술’ 이라는 코드를 잘 녹여내어
멋지고 풍요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그리고
비즈니스로는 고부가가치를 창조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뉴욕 곳곳에 예술적 요소가 스며들어 있었고 뉴요커들은
잘 사나 못 사나, 사는 지역, 인종에 상관없이
브로드웨이 뮤지컬공연에서부터 길거리 악사연주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현재 자신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을 적극적으로 즐기고 있었습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200년이 안되는 짧은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여러 분야에서
전 세계를 리드하는 국가가 된 이유도 일찌감치 '예술은 전략적인 무기'라는 것을 인지하고 국가 정책차원에서 키워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재즈가 전 세계에 가있던 미군 위문공연이란 명분을 활용해서 해당 나라에 퍼지게 되거나 헐리우드 영화가 단 기간에 유럽영화를 제치고 세계 영화산업을 주도하게 된 것도 우연히 아니라 국가가 전략적인 차원에서 전폭적으로 지원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뉴욕에 대한 의문은
뉴욕에서는 예술이 일상 속에 공기처럼 존재하고 예술을 차원높은 전략무기로 인식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환경은 개인과 기업의 예술적 안목과 역량을 향상시켜 전반적인 사회, 경제, 기타 부분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으로 시원하게 풀려버렸습니다.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이었습니다.
Seoul Again
곧 도착을 알리는 안내멘트가 예쁜 스튜어디스의 낭랑한 목소리를 타고 나를 깨운다.
모든 게 한바탕 꿈이었을까? 그동안의 수많은 일들이 꿈에서 깨듯 기억 저편에 사라진다.
비행기 창문밖으로 인천공항 활주로가 보인다. 순간 잠실 주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의 커다란 함성이 들리는 듯 하다. 이제 본격적인 내 인생의 재즈연주가 시작된다.
비록 파울볼이 나와도 비록 헛스윙을 해도
포볼로 나가진 않을테다.
세상아! 인생아! 던져라. 커브볼이건 돌직구건..
Let’s Swing!
'재즈와 인생은 계획대로 되지 않으며 무엇인가는 항상 어긋난다.
하지만 바로 거기에 재미가 있다'
20대와 30대 초반을 걸친 인생 전반기의 여정을 끝내면서
깨달은 것이 많습니다.
인생은
질서있는 짧은 순간들로 이뤄진 혼돈이며
필연같은 우연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예기치 않은 일들로 가득 차있습니다.
우리가 인생 살아가는 것은
마치 재즈연주가가 무대에 올라서
어떤 연주를 할 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자신의 멜로디를 그때 상황에 맞게
풀어나가는 과정과 너무나 닮아있습니다.
즉흥적으로 계속 변해가는 재즈연주의 흐름을 타며
내 자신의 멜로디를 그 환경에 맞게 연주해나가려면
끊임없이 변화와 성장을 하며 창조해 나가야 합니다.
삶 또한 그러합니다.
It don't mean a thing if it ain't got that swing.
“스윙(Swing)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 없다” 라는 뜻인 윗 문장은 재즈 거장 듀크 엘링턴의 대표곡입니다.
스윙(Swing)은 재즈특유의 불안정한 리듬으로 재즈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리듬이죠. 보통 그 스윙감을 제대로 즐길 수 있을 때, 또는 연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재즈를 이해한다” 라고 합니다. 스윙은 2와 4 beat 에 강박이 들어가는 불안정성으로 인해서 계속 움직여야 하는 리듬입니다.
불안정하기에 정체되어있지 않고 계속 움직여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죠.
이 스윙이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불확실성 시대의 최대 안정은
불확실성을 즐기며 끊임없이 나를 성장시키고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저 또한 한치앞을 모르는 불확실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러했기에 기존의 나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나를 창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불확실성과 불안정을 피하는 것이 안정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제하고 활용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진정한 안정입니다.
현재 전 세계는 4차 산업혁명, 100세 시대 등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변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지금껏 인류가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세계가 바로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번 코로나로 인하여 그 변화는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회는 위기에서 오고 새로운 판이 짜여질 때 옵니다.
현재 우리는 혼란스러운 한국 사회와 인류사의 커다란 패러다임이 바뀌어지는 순간을 동시에 맞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기의 얼굴로 다가오는 기회의 진짜 모습일지 모릅니다.
불확실성과 불안정을 즐기면서 끊임없이 새로움을 창조해나가는 재즈처럼
우리는 지속적인 변화와 성장, 그리고 창조를 통해서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을까요?
코페니아는 그 미래를 만들어가는 여정에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코페니아 대표 전진용